이이 나오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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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이 나오즈미는 오미 히코네번 영주 이이 나오타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와 형들의 잇따른 사망으로 인해 가문을 계승했다. 1668년 에도 막부의 다이로에 취임했으나, 재임 중 여러 사건을 처리했다. 그는 온화하고 기지가 풍부한 성격으로 평가받았으며, 낭인의 할복 소동을 해결하거나, 조루리자카의 복수 사건에서 유배형을 내리는 등 관대한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사찰을 재건하고, 부친을 기리는 층탑을 건립하는 등 종교적 활동도 펼쳤다. 그는 자녀가 있었음에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조카를 양자로 들여 가문을 잇게 하고, 1676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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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나오즈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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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이이 나오즈미 |
![]() |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간에이 2년 7월 15일 (1625년8월 17일) |
사망 | 엔포 4년 1월 3일 (1676년2월 16일) |
묘소 | 히코네시의 세이료지 |
관위 | 종4위하좌소장, 소부두 |
막부 | 에도 막부다이로(대정참여)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쓰나 |
번 | 오미히코네번주 (제3대) |
부모 | 아버지: 이이 나오타카 |
형제 | 나오시게, 나오히로, 나오쓰나, 이이 나오즈미 |
자녀 | 나카노 노부아키 |
양자 | 나오오키, 향운원 (아베 마사타케 실) |
2. 생애
이이 나오즈미는 1625년 오미 히코네번 영주 이이 나오타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659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히코네번 영주가 되었고, 1668년 에도 막부의 다이로에 취임했다. 1676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정실 부인을 들이지 않았고, 형 나오쓰나의 아들인 나오오키를 양자로 삼아 가문을 계승하게 했다. 측실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는 가신의 분가로 들어갔다.[1]
2. 1. 유년 시절과 가독 상속
간에이 2년(1625년), 오미 히코네번 영주 이이 나오타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가메노스케였다.아버지 나오타카와 그의 세자였던 나오시게(나오타카의 장남)는 자주 불화를 일으킬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만지 원년(1658년)에 나오시게는 폐적되었다. 이후 다음 세자가 된 나오쓰나(나오타카의 넷째 아들)도 같은 해 급사했다. 그 때문에 만지 2년(1659년), 다섯째 아들인 나오즈미가 세자가 되었고, 아버지의 사망으로 그 뒤를 이어 오미 히코네 번의 영주가 되었다.
2. 2. 다이로 취임과 활동
간분 8년(1668년) 11월 19일, 에도 막부 다이로에 취임했다. 다만, 나오즈미를 다이로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다이세이 산요 항목 참조).[1]2. 3. 죽음과 가문의 계승
엔포 4년(1676년) 1월 3일 사망하였다. 향년 52세였다. "아이가 태어나도 후계자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정실 부인을 들이지 않고, 형 나오쓰나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나오오키를 양자로 들여 가독을 잇게 했다. 측실과의 사이에 아이는 있었지만, 가신의 분가로 들어가 나카노 노부아키라고 칭했다.[1]3. 인물
이이 나오즈미는 온화하면서도 기지가 풍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도쿠가와 미쓰쿠니와의 일화, 낭인의 할복 소동, 조루리자카의 복수 처리 등 여러 일화를 남겼다. 세이간지 재건, 석조 칠중 층탑 건립 등 종교적 활동에도 힘썼으며, 하이쿠 시인 모리카와 쿄료쿠를 가신으로 두는 등 문화적 소양도 있었다.
3. 1. 성격과 일화
이이 나오즈미는 온화하면서도 기지가 풍부한 성격이었다. 어느 날, 도쿠가와 미츠쿠니를 수행하여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다회에 참석했는데, 이에츠나는 차를 끓이는 데 익숙하지 않아 혼자서는 다 마실 수 없는 양의 차를 미츠쿠니에게 내놓았다. 미츠쿠니도 쇼군이 직접 내린 차를 남길 수 없어 곤란해했다. 이에 나오즈미가 앞으로 나서서 미츠쿠니에게 "상감께서 끓이신 차를 받을 기회는 좀처럼 없습니다. 만약 남기신다면 꼭 저에게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청하자, 이에츠나도 "남으면 그대로 나오즈미에게 주어라"라고 말하여 그 자리가 마무리되었다고 한다.에도에서 낭인이 다이묘 저택 문 앞에서 "할복할 테니 카이샤쿠해 달라"고 협박하여 돈을 요구하는 사례가 다발했는데, 이이 가문의 문 앞에도 나타났지만, 나오즈미는 태연하게 "하고 싶다면 할복하면 된다"라고 대답하고, 안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한 후 할복하게 했다. 이로 인해 할복 소동은 진정되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타키구치 야스히코는 단편 소설 "이문 낭인기"를 썼고, 그것을 원작으로 하여 할복과 『일명』이라는 두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세이간지(시가현 마이바라시)를 게이안 3년 (1650년)에 재흥했다. 또한 아버지 나오타카에게 은혜를 느껴, 공양을 위해 높이 8m 정도의 석조 칠중 층탑을 비와호의 타케시마에 세웠다.
다이로 재임 중에, 에도의 시중을 소란하게 했던 조루리자카의 복수가 일어났다. 복수를 이룬 일당은 자결하지 않고 막부에 출두하여 재판을 맡겼다. 이는 패거리를 지어 복수한 것이라 엄벌이 불가피한 판결이 내려질 상황이었지만, 다이로였던 나오즈미가 사형을 면하고 먼 섬으로 유배 보냈다. 게다가 수년 후에는 은사를 내려 복수자들을 히코네 가신으로 채용했다. 이 사건은 아코 사건과 유사한 점이 많아 아코 낭사들이 사전에 참고했다고 여겨진다.
모리카와 쿄료쿠는 나오즈미의 가신이었다.
3. 2. 문화적 소양
이이 나오즈미는 온화하면서도 기지가 풍부한 성격이었다. 어느 날, 도쿠가와 미쓰쿠니를 수행하여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다회에 참석했는데, 이에쓰나는 차를 끓이는 데 익숙하지 않아 혼자서는 다 마실 수 없는 양의 차를 미쓰쿠니에게 내놓았다. 미쓰쿠니도 쇼군이 직접 내린 차를 남길 수 없어 곤란해했다. 이때 나오즈미가 앞으로 나서서 미쓰쿠니에게 "상감께서 끓이신 차를 받을 기회는 좀처럼 없습니다. 만약 남기신다면 꼭 저에게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청하자, 이에쓰나도 "남으면 그대로 나오즈미에게 주어라"라고 말하여 그 자리가 마무리되었다고 한다.에도 시대에는 낭인이 다이묘 저택 문 앞에서 "할복할 테니 카이샤쿠해 달라"고 협박하여 돈을 요구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이 가문의 문 앞에도 이러한 낭인이 나타났지만, 나오즈미는 태연하게 "하고 싶다면 할복하면 된다"라고 대답하고, 안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한 후 할복하게 했다. 이로 인해 할복 소동은 진정되었다고 한다. 다키구치 야스히코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단편 소설 "이문 낭인기"를 썼고, 이를 원작으로 하여 할복과 『일명』이라는 두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나오즈미는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세이간지(시가현 마이바라시)를 1650년에 재건했다. 또한 아버지 나오타카에게 은혜를 느껴, 공양을 위해 높이 8m 정도의 석조 칠중 층탑을 비와호의 다케시마에 세웠다.
다이로 재임 중에 에도에서 조루리자카의 복수 사건이 일어났다. 복수를 이룬 일당은 자결하지 않고 막부에 출두하여 재판을 맡겼다. 이는 패거리를 지어 복수한 것이라 엄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다이로였던 나오즈미가 사형을 면하고 먼 섬으로 유배 보냈다. 게다가 수년 후에는 은사를 내려 복수자들을 히코네 가신으로 채용했다. 이 사건은 아코 사건과 유사한 점이 많아 아코 낭사들이 사전에 참고했다고 여겨진다.
하이쿠 시인 모리카와 교료쿠는 나오즈미의 가신이었다.
3. 3. 종교적 활동
1650년(게이안 3년)에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세이간지(시가현 마이바라시)를 재건했다. 또한 아버지 나오타카에게 은혜를 느껴, 공양을 위해 비와호의 타케시마에 높이 8m 정도의 석조 칠중 층탑을 세웠다.4. 계보
- 아버지: 이이 나오타카
- 어머니: 슌코인 (이시이 씨)
- 양아버지: 이이 나오타다
- 정실: 이이 나오아리의 딸
- 측실: 각 씨(角氏)
- * 아들: 나카노 노부아키
- * 아들: 무토 모토헤이 (생모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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